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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旅行


우리 어머니는 10년전의 오늘 돌아가셨다. 대장암이였다.

아버지는 그것보다 더 11년전에 이미 돌아가셨었다. 심부전으로의 급사였다.
어모니는 그 당시 백수였던 아들과 학생이였던 딸을 가지고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정리하느라 고생이 컸을 것이다.
그것도 일단락해 아들도 희망했던 광고제작회사에 취직했다.

그 아들이 잠시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있었으나 어쩌다가 한국에 빠저 버렸다. 1년에 두번정도는 휴가를 얻어 한국으로 떠나 버린다.
그리고 가끔 서투른 일본어의 여자한테서 국제전화까지 걸려 오게 되었다.

현재와 달리 그 당시의 일본에서는 한국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으니 어머니도 아들의 마음이 잘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오타쿠 (매니아) 인 아들로서는 어느 수준 이상의 정보를 얻거나 한국어를 배우려면 한국에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회사를 그만 두고 한국에 유학을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50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유족 연금과 가방 공장에서의 파트 타임으로 생계를 이끌어 왔던 어머니. 학생이였던 딸도 백수였던 아들도 취직을 해 이제 그런대로 생활이 안정되어 왔는데 아들은 이해 되지 못한 이유로 회사를 그만 둔다고 한다.
보통으로 생각하면 찬성할 리가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만히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났을 때 말문이 닫히는 버릇은 내가 똑 같이 이어 받았다).

결국 유학에 관한 수속같은 것은 혼자서 다 해 버리고 마침내 아들이 일본을 떠날 날이 왔다.
어머니는 이른 아침 책따위로 무거운 아들의 짐을 자전거에 실어 역까지 바래다 주었다.
짐을 받아 역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에서 내려다 보니 자전거 옆에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우러러 보는 어머니가 있었다. 눈이 맞자 어머니는 힘 없이 미소 지으면서 한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그 모습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유학을 마치고 아들은 다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1년 정도 어학연수를 했다고 써 주는 회사는 별로 없었고 무엇보다 유학으로 다 타버리고 재가 된 것 같아 기력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흐름에 맡겨 책이나 잡지를 디자인하는 일을 프리랜스로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같이 공부했던 재일교포 3세인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자신은 몇번이나 한국에 갔고 며누리도 한국계 집안에서 마지했다. 가까운 시일에 우리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꼭 한번 한국여행을 하자, 그때는 경주에 가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안된 저금은 유학 비용으로 사라져 버렸고 귀국후 일을 재개했는데 시작한지가 얼마되지 않아 수입이 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결혼을 해서 새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친정집이 이해해 주셔서 거의 다 그쪽에 의지했지만 이쪽의 부담도 그런대로 커 어머니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러다가 몇년전에 수술했던 대장암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일본에서도 손 꼽히는 암 전문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수 없을 정도로 진행이 빨랐다. 어머니의 뱃살은 날마다 시껌게 썩어 가는데 의사도 간호사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훌륭한 병원의 첨단설비도 무용지물. 일본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그 큰 병원에서 우리 어머니가 받은 치료라곤 마취나 마약같은 것으로 아픔과 괴로움을 덜 해 주는 것이 고작이였다 (생각해 보면 말기암 환자에게는 그것이 바로 첨단적인 치료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결국 입원한지 두달도 채 안돼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여행은 이제 영원히 못 가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몇번이나 한국에 갈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같이 갈 작정이였던 경주에는 마음이 아파서 평생 못간다.

 …今日の話はちょっとこっぱずかしいので、韓国語で書いてみました。

by kobugimori | 2007-07-06 01:16